gallery biim

                                                  '작가 박병춘' photo by chosooyeon





칼의 화가, 박병춘 작가를 만나다.



새벽 3시 반, 양평 골짜기...
사람의 모든 에너지가 새로 충만되고,
가장 활기차게 맥이 뛰며 운동을 시작한다는 시각이라지만,
주위는 사뭇 어둡다.
박병춘 작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문 밖의 새벽과 마주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간밤의 묵은 기운을 새벽의 청량한 찬 공기로 바꾸어 주고 나서
손에 익숙한 칼을 들어 캔버스와 마주 앉는다.
짙은 색으로 두껍게 칠해진 캔버스를 칼로 벗겨내 지워가는 작업을
박 작가는 이십 년 째 계속하고 있다.
칼을 단단히 쥐고,
힘을 주어 둥글게 곡선을 그리며 캔버스의 물감을 지워 가는데,
캔버스에 남는 것은 오히려 날카로운 선이다.
그의 작업은 그렇게 새벽부터 치열하게 시작되고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사람 사는 세상 속 사교로 멈춰진다.

잠깐 캔버스에 채색하여 작업을 하였으나,
색(色)에 빠지니 오히려 작업이 어려워지는 것 같아
다시 칼을 쥐고 무채색의 물감을 입힌 캔버스를 벗겨내는 작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그에게 예술가로서의 무뎌지지 않는 고뇌의 모습이 보인다.
캔버스를 내려 긋던 칼이 무뎌지면 전동숫돌에 불꽃을 일으키며 갈아내고,
연단하는 작업 또한 그런 그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색을 벗겨가다 보면 긁혀 일어난 색의 상처들이
캔버스 위에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것만 같다.
결연함과 처연함..
그는 드러내는 것일까? 지워 가는 것일까?
나의 우문에 그는  ‘지워가는 것에 가깝다’고 대답한다.
그의 명쾌한 대답에 ‘수십 년을 지우고도 더 지워야 할 것이 남은’
그의 세월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부드러운 붓 대신 날카로운 칼..
물감을 발라 드러내는 것이 아닌  긁어 지워가는 작업.

“캔버스에 구멍이 뚫리기도 하죠. 캔버스가 늘어지는 것 같으면
다시 세게 조여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야 하고..”
“매일 여러 시간 칼을 쥐고 휘두르며 작업을 하다 보니,
손가락이 부어서 저녁에는 찜질로 풀어주어야 해요. 작업이 중노동..”이라며
허허 웃는 박 작가는 작품을 시작하는 일부터 마무리하는 일까지
남의 손을 빌려본 일이 없다.
한 작품을 끝내고 나면  받침대에는 벗겨낸 물감이 우엉 껍질처럼 감겨 쌓인다.
마치 평생을 그림만 그려온 그의 인생이 그에게 그렇듯이...
뭐든지 제대로 배운 사람들은 청소와 정리를 남에게 맡기지 않는 특징이 있는데
그도 다르지 않다.
지워내기 위해 긁어 내고, 그렇게 떨어져 내린 잔재들을 치우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50년을  그림만 그리며 살아 왔는데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박작가의 눈빛은 형형하고 맑다.
남은 것과 남지 않는 것.
입을 굳게 다문 그의 모습에서 예인(藝人)으로서의 결기와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그러나 신경질적인 결기가 아니라  살아온 세월에서 쌓아온
너그러운 허용과 좋은 집안 출신이 가질 법한 품위가 스며 있는 사람,
그의 손을 통해 수없이 지움으로 오히려 드러내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날이 기다려 진다.
                                           
 
                2011년 초봄, 배정원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2-03-09 15:51:05 board에서 이동 됨]